데이터양의 차이
오타쿠 감성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
게임과 현실의 차이는 단순히 데이터양의 차이일 뿐이다.
이 세계의 데이터가 풍부하고 복잡해지면 질수록, 현실 세계와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진다.
이젠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돌아가야 고등학생 시절, 한창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져있을 무렵 깊게 와닿은 내용이었다.
완전한 ‘가상현실게임’을 배경으로 하는 『소드아트온라인』에서 게임과 현실의 차이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이야기 하는 부분이면서
어쩌면 작가의 생각을 나타내는 부분이라고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그 이후로 ‘데이터양의 차이‘라는 요소는 내 인생에서 멀어지지않고 계속해서 맴도는 비주기적 혜성과 같은 개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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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멍 그리고 ‘Whale’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쭉 플레이 해오진 않았지만 잊었다가도 다시 다운받았던 《트릭스터》라는 게임이 있다.
《트릭스터》의 배경이 되는 까발리에섬 속에서 해변을 배경으로 한 ‘코라비치’와 ‘데저트해안’ 마을(몬스터에게 공격받지 않는 안전지대)이 있다.
게임을 진행하면서 굳이 갈 필요가 없어도 나는 종종 두 마을에 찾아갔다.
밤이 되면 잔잔한 음악과 파도소리가 섞인 BGM이 들려오는데 그 소리를 들으며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실제로 그 게임 속 마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파도소리와 BGM은 3MB 내외의 데이터 파일이 재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소리는 짧은 주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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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고 종종 바다에 가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이 때 들려오는 파도소리는 비슷하지만 같지 않았고 반복되지도 않았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이게 바로 게임과 현실의 데이터양 차이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만약 내가 살아있는 시간보다 더 긴 주기를 가지는 파도 소리 데이터가 있다면 과연 나는 데이터와 구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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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MUSEUM: ETERNAL NATURE]의 전시를 관람하면서 마지막 세션에 있는 ‘Whale’은 고래의 형상을 띄는 파도와 함께 파도소리가 함께 들리는 전시였다.
위에 쓴 글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가만히 앉아 파도소리 듣는 걸 좋아하기에 [ARTE MUSEUM: ETERNAL NATURE]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물렀는데
여기서도 느껴지는 데이터양의 한계로 인한 규칙성과 반복은 아쉬움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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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화된 ‘데이터양의 차이‘
만약 게임 플레이어의 선택이 단지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에 불과하다면, 그건 게임 밖 현실의 선택과 얼마나 다를까. 현실의 선택은 정말 게임보다 훨씬 자유로울까?
『아무튼, SF게임』을 읽다가 이와 관련된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여러번 발화된 주제이면서 한 번은 생각을 정리해봐야겠다고 느꼈기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존재하는 게임 역시 선택지에 따라 여러 엔딩이 존재하긴 하지만 하나의 엔딩을 추가하기 위해서는 제작비, 인력과 같은 많은 부분에서 소비가 커진다.
결국 이 역시 ‘데이터양의 한계’로 이어지며 현실은 단지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데이터양을 가졌고, 이로 인해 수많은 선택지가 존재하는 게임이라는 생각이 이르른다.
수많은 메타버스 우주 갈래에서 내 선택에 따라 하나의 우주만이 남게 되는 느낌이다.
넓은 맵과 높은 자유도를 가져 플레이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오픈월드 게임 역시
많은 데이터양을 통해 선택지가 늘어나고 보다 현실의 모험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듯이
스토리에도 더 많은 데이터양이 존재한다면 소설에나 존재하는 가상현실게임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약적인 기술 발전으로 인해 현실과 비슷한, 아니라면 최소한 사람이 느낄 수 없는 정도의 데이터양의 구현이 가능하다면
과연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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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레이션 이론
: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이론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 계열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이지만
그럼에도 좋아하는 비현실적인 이론이 있다면 바로 시뮬레이션 이론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도 엄청난 데이터양을 바탕으로 누군가가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이라면 어떨까
바로 몇 줄 위에 적었듯이 인간의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 현실과 구분 불가능한 시뮬레이션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고,
반대의 방향으로 이미 누군가가 만들었을 가능성도 아주 충분하지 않은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아주 단순한 가정 혹은 추측이지만 그렇기에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블랙홀 안에 다른 우주가 존재하고, 그 안에 또 다시 블랙홀이 존재할 수도 있듯이
어쩌면 시뮬레이션 속 시뮬레이션, 다시 그 속의 시뮬레이션과 같은 마트료시카가 아닐까.
설령 시뮬레이션이라고 해도 내가 살아가는데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현실에 대한 호기심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