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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민음사, 어렵다…

저번에 읽었던『1984』는 읽으면서 책 난이도 자체가 너무 높아 어렵게 느껴졌는데,
『노인과 바다』는 쉽게 읽힌 반면 ‘그래서 뭐? 왜?’라는 느낌이 가득 들었다.

낚시 고수인 노인이 한 명 있었고, 한동안 제대로 된 물고기 한 마리 못 잡다가
겨우겨우 대어 청새치 한 마리를 낚을 수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상어에게 다 뜯기고
결국엔 뼈만 남긴 채 돌아왔다.

…끝 아닌가?

물론 책을 읽으면서 책 내용 그 자체이기보다 읽는 이로 하여금 개인의 해석을 요구한다는 느낌은 들었다.

근데 새롭거나 감탄이 느껴질만한 표현도 없었고, 명작이라고 할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책 분량 자체가 많지 않긴 했지만 이 정도는 짧은 기고문 정도로도 독자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았을까.

청새치

그래도 책을 읽었으니 한 번 나의 해석을 던져보기도 하자.

내게 청새치는 과연 무엇일까.

끊임없이 싸우고 쟁취해야 하면서도, 인생에서 떼어낼 수 없는 동반자.

어느 무엇이라고 딱 잘라 정의하긴 없지만, 나에겐 내 전공에 대한 자기개발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눈앞에 있는 학점을 위해 꾸역꾸역 공부했던 학사과정,
학위, 그리고 내 실험을 위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배움을 놓지 않았던 석사과정,
사회 속에서 내 역할을 수행하고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계속해서 쌓아나가는 지금.

실체도, 끝도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마주하고 나아가야 하며,
지나치게 멀어지지도 그리고 가까워지지도 않도록 거리를 조율해야 하는 내 인생의 과정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상어

그렇다면 내게 상어란 무엇일까.

긴 고민 없이 떠올랐던 ‘청새치’에 반해 ‘상어’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는 ‘나 스스로가 상어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바로 떠올랐지만
다른 외적인 요소가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았고,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

예컨대, 낮은 급여와 그로 인한 제약, 잡무 위주의 업무 환경, 자기개발에 집중하기 힘든 본가의 소란스러운 분위기.

하지만 이들 모두, 따지고 보면 내 의지로 극복 가능한 것들이었다.

결국 ‘상어’는 다시 ‘나’로 돌아왔다.

내게 상어란, 나태함과 오만함, 그리고 자기합리화로 얼룩진 ‘나’ 자신이다.

표류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다시 나아가려는 다짐은 자주 하지만, 그 다짐이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을 자주 먹으면서라도 조금씩 나아가려 한다.

오늘도 이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았으니, 적어도 이틀만큼은 나아가는 나로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싸우기 위한 싸움

무슨 말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내가 느낀 산티아고는 이랬다.

그 오랜 세월동안 쌓은 낚시 경험을 통해 산티아고는 비록 승리할지라도 싸움의 끝이 본인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청새치의 입질과 첫 번째의 뛰어오름으로 그 크기와 무게를 가늠할 수 있었을테고,
설령 작살을 통한 포획에 성공하더라도 항구로 돌아오는 과정 중 달려드는 상어들에게 뺏길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집을 가지며 끝끝내 싸움에서 승리는 했으니…

산티아고와 내가 바라보는 삶의 방향성이 다른 탓인지 솔직히 나에겐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너무 빠르게 현실과 타협한 것일까.

자기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방향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나아가면,
현실 그 중에서도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큰 제약이 생겨 싸움을 이어가기 어려울 뿐더러
산티아고처럼 승리하더라도 남는 것은 단지 승리했다는 개인의 만족감 뿐이다.

『노인과 바다』 역시 산티아고는 계속해서 낚시를 이어갈 것이라는 표현만 있을 뿐,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산티아고의 생활 자체에 대해 나아지는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청새치를 낚으면서 잃은 수많은 어구들을 대체 어떻게 마련해서 낚시를 계속해나갈지가 궁금해진다.

헤밍웨이는 결국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뻔하게 말하는 것처럼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진심으로 나아가라’는 책임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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