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눈이 내리다』김보영

『고래눈이 내리다』
김보영
래빗홀
발행일 2025-05-14
1회독 202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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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고?
스페이스 오디세이 트릴로지 세 권을 연달아 읽으면서 인상 깊은 작품이라고 까진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름 괜찮은 작품이라고 만족하면서 읽었다.
특히나 SF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양자물리와 우주에 대해 쓴 부분이 만족스러웠고,
그래서 신간도 충분히 읽어봄직하다 생각하고 금요일 퇴근길에 서점에 들려 책을 샀다.
고래눈이 내리다
눈발이 짙어지자 나는 고래가 죽었다 보다 생각했다.
9p
얼마나 매력적인 첫 문장인가.
그 뒤로 이어지는 ‘죽음과 축복의 대비’, ‘아가미’라는 표현으로 SF의 세계관을 추측하는데 도파민이 폭발하는 즐거움을 주었다.
눈발과 마을이라는 표현에 지상의 생물이라고 한정지은 내 머리로는 배경이 심해라는 것을 다음 페이지 넘기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물론 내가 발광포라는 단어의 뜻을 알았다면 훨씬 빠르게 추측이 가능했겠지만.
그렇게 터지는 도파민은 얼마 가지 않고, 이 뒤로 빠르게 식었다.
심해와 고래의 죽음, 눈.
추측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너무 뻔한 표현이다.
그 외에도 심해에 사는 생물들의 특징들을 이용해서 등장인물로 표현하는 전개는 SF소설이라기보다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 심해 생물들을 소개하는 유아용 컨텐츠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면 위로부터 내려오는 죽음의 눈도 미세플라스틱이라는 게 기본교육과정을 마친 어른이라면 누구나 알 것 같았다.
어느 재미도 찾아볼 수 없는 전개는 그렇게 급작스러운 자연재해와 함께 이야기의 끝을 맞이한다.
책의 제목으로도 쓸만큼 이 단편소설집의 대표작으로 내세우기엔
환경오염과 온난화라는 사회적 이슈를 담은 채 SF를 흉내낸 평면적인 작품과 같이 느껴진다.
이걸 환경 문제를 다룬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감탄했던 부분은 어디인지, 과연 어느 부분이 내가 놓쳐서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자세히 알고 싶다.
다만 그 감탄이 단순한 도덕적 명분이나 메시지 때문이라면, 평론가로서의 전문성과 책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느꼈다.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
이어지는 다음 단편 소설들 역시 마음에 와닿는 무언가가 없었다.
그냥, 적혀있는 글을 읽었고 또 읽었다.
읽는 행위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를 읽었을 때 기존과는 다른 결이 느껴졌다.
중요한 문제는 결국 하나였다.
영혼은 전송되는가?
121p
영혼과 사후세계의 존재를 믿는 종교적 가치관과 SF적 배경 속 과학 기술의 충돌.
내가 다른 사람과 구분될 수 있는, 나로서 존재하는 기준과 의의에 대한 질문.
나에게 연쇄적인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SF적 허용과 현실 속 과학적 사실에 대한 경계였다.
소설에서 말하듯 생물도, 무생물도 모두 분자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명백하다.
생물은 단지 분자들끼리의 상호작용, 시냅스의 전기적 신호로 인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재료로 쓸 수 있는 원자가 충분하다고 했을 때,
생물을 이루는 분자의 종류와 수, 배치, 상호작용까지 모두 스캔할 수 있고 동일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을 때,
과연 다른 생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과학과 철학이 섞인 논의는 복제 인간, AI와 같은 분야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는 부분인데
끊임없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위와 같은 SF 설정이 새롭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설정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스토리 전개가 재밌다.
새벽기차
사회와 벽을 쌓고 살지 않았더라면 누구나 알만한 작품 ‘설국열차’를 오마주한 단편소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여러 인상 깊었던 작품들에 대한 오마주로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지구와는 다른 환경으로 인해 낮과 밤의 일교차가 매우 크며, 지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설정도
원인과 이후 세계관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을 뿐 자주 등장하는 디스토피아 세계관 중 하나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기차 위에서 사회를 이루는 ‘설국열차’는 그 설정이 매우 흥미로워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았고,
이를 오마주한 ‘새벽기차’는 반대로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벽을 향해 달려나가는 설정이었다.
기차가 멈추자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181p
하늘은 늘 푸른 기가 도는 분홍빛이었다.
187p
멈추는 것과 흐르는 것의 역설적인 대비와 애초에 멈추는 게 불가능한 시간에 대한 표현.
‘고래눈이 내리다’와 마찬가지로 첫 문장부터 매력이 가득했다.
‘새벽기차’만의 SF적 차별성이라면 기차에 탑승한 승객들은 계급을 이루거나 싸우지 않았다.
기차라는 커다란 무생물 속에 기생하며 기차의 일부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되었다.
마치 사람이라는 생물 속에도 여러가지 미생물들이 공존하여 살아가듯이.
기차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의견에 대해 반박하는 일이 없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이름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하나의 복합구성체가 되어갔다.
이와 대비되는 지프 운전자는 불필요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혼자 계속해서 도로 위를 달렸다.
마치 주어진 환경 속에서도 개인의 개성을 꿋꿋이 지켜나가는 고집쟁이처럼.
여기에 달리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땅 밑으로 들어가 생활하는 딱딱한 피부를 지닌 인간들까지.
20쪽 정도의 매우 짧은 단편 소설이기에 이야기의 전개에 따른 스토리적 요소는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방향성이,
독자에게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해 인상 깊었다.
귀신숲이 내리다
작가는 SF 속 존재하는 수많은 세계관을 독자에게 글로써 전달해주지만 결코 작가의 상상속에 존재하는 그 세계를 오롯이 전달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작가가 설명해주는 세계관에 대한 힌트를 가지고 머릿 속에서 주관적인 조미료를 더해 SF 속 세계를 상상한다.
나는 그런 소설 속의 세계를 상상하며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귀신숲이 내리다’는 『고래눈이 내리다』에 실린 단편 소설들 중 가장 시각적인 단편 소설이었다.
얼음 행성을 둘러싸고 있는 인공 구조물, 그 안에 만들어진 미생물 중심의 새로운 생태계,
자아를 가진 인공 구조물에 의해 습기가 가득 차고,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그 생태계,
마침내 폭발하는 순간까지.
인공 구조물을 탐색하는 등장인물을 통해 작가 상상속의 그 공간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그렇게 나는 그 인공 구조물 속을 함께 유영할 수 있었고, 영화의 장면같은 공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 단편 소설이 가지는 스토리는 어쩌면 조금 클리셰라고 느껴질 정도의 평면적인 전개였지만,
그 과정 중 보여주는 장면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봄으로 가는 문
‘그런데 비행사들이 다 가겠다고 답했다지 뭐니. 왜냐면 자신의 인생은 애초에 우주에 있었으니까.‘
‘새벽기차’보다도 더 짧은 단편 소설이지만 명확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있었다.
개인이 소망하는 것을 이뤘고 또 이룰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로 갈 수 있는 문.
그 문을 바라보며 어느 세계를 선택할지 고민하는 평범함 그 자체의 주인공.
소재 자체는 유토피아로 가는 문이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SF적인 장치일 뿐이었다.
우주비행사의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풀어낸 전체 맥락을 보았을 때,
‘대다수가 살아가는 평범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어떻게 설정하고 나아갈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남들과는 다른 개성있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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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서평의 시작 부분에도 언급했듯이 『고래눈이 내리다』의 소설집을 대표하는 ‘고래눈이 내리다’ 단편 소설에 대한 감상은 최악이었다.
책의 가장 뒷부분 작가의 말을 읽었을 때
‘고래눈이 내리다’는 애초에 주제가 결정된 상태에서 짧은 기간에 기고해야 했던 단편 소설이라고 언급했기에
실망했던 작품에 대해 어느정도 납득이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소설집의 대표작으로 뽑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중반부 이후부터 수록된 단편 소설들은 SF적 요소와 함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한 느낌도 받았으며,
독자의 흥미를 가득 유발하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전개도 깔끔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기대감이 실망감이 되고, 실망감은 다시 만족감과 감탄이 되었다.
단지 『스페이스 오디세이 트릴로지』가 만족스러웠기에 출간되자마자 산 책이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김보영 작가의 신간이 또 나온다면 일단 믿고 살 것 같다.